오늘은 정호승 시인님의 시 '슬픔이 기쁨에게'를 만납니다. 그대도 기쁨이 좋으시지요? 그런데 왜 시인은 우리에게 슬픔을 주겠다고 할까요? 우리에게 슬픔이 왜 필요하다고 할까요? 함께 생각하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읽기
슬픔이 기쁨에게
- 정호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위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 정호승 시선집 「내가 사랑하는 사람」 (비채)중에서
이 시는 위 책에 실린 시 270편 가운데 가장 앞에 실려있습니다. 시인의 시선집에 가장 앞에 실렸다는 점에서, 이 시에 대한 시인의 각별한 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왜 이 시를 귀하게 여기고 시선집의 1번 주자로 내세웠을까요?
2. 기쁨이 필요한 저에게 슬픔을 준다고요?
그런데요, 이 시는 우리를 당혹스럽게 합니다. 항상 슬픔보다 기쁨을 원하는 우리를, 늘 슬픔을 멀리하고 기쁨을 추구하는 우리를 의아하게 합니다.
-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싫습니다, 시인님. 저는 슬픔이 싫습니다. 기쁨을 주셔요. 이렇게 애원해도 시인은 슬픔을 주겠다고 합니다. 어떤 슬픔일까요?
-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시인은 슬픔이 사랑보다 소중하다고 합니다. 슬픔이 사랑보다 소중하다니!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일까요? 이 구절을 읽었을 때, 문득 백석 시인님의 아래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백석 시인님이 쓰신 '슬픔과 진실'이라는 제목의 글을 잠깐 읽어볼까요? 백석 시인님이 선배 시인 박팔양의 시집 ‘여수시초(麗水詩抄)’에 대해 쓴 독후감인데 1940년 만선일보에 실린 글의 한 구절입니다.
진실로 인생을 사랑하고 생명을 아끼는 마음이라면 어떻게 슬프고 시름차지 아니하겠습니까? 시인은 슬픈 사람입니다. 세상의 온갖 슬프지 않은 것에 슬퍼할 줄 아는 혼입니다.
- 「백석문학전집2-산문·기타」 (김문주 이상숙 최동호 엮음, 서정시학) 중에서
백석 님은 '시인은 슬픈 사람'이라고 하네요. 진실로 인생을 사랑하고 생명을 아끼는 마음이라면 슬프고 시름에 찬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슬픔의 내면을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진실로 인생을 사랑하고 생명을 아끼는 마음으로 보니까 삶이 온통 슬픔으로, 고통으로 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슬프고 시름찬 마음이 될 수밖에요.
슬픔을 모르고 슬픔에 빠진 생명의 입장을 모르고 기쁨만 추구하는 나에게, 시인은 슬픔을 주겠다고 합니다. 이 말은 진실로 인생을 사랑하고 생명을 아끼는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는 당부이기도 할 것입니다.
3. 슬픔의 눈으로 보이는 삶의 그렁그렁함!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슬픔을 주겠다고 합니다. 진실로 인생을 사랑한다면, 생명을 아낀다면, 추위에 떨고 있는 할머니의 귤을 깎으며 기뻐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를 읽고 나서 주위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 슬픔의 힘!
기쁨의 힘으로 보이지 않던 삶의 그렁그렁한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겨울 거리의 할머니가 파는 귤값을 깎겠는지요?
글을 읽고 마음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정호승 시인님의 시를 더 읽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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