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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레미 드 구르몽 시 머리카락 해설 감상

by 빗방울이네 2026.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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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시인 레미 드 구르몽의 시 '머리카락'을 만나 봅니다.

냄새!

연인의 머리카락에서 난다고 하는, 무려 30가지의 냄새를 소개한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레미 드 구르몽 시 '머리카락' 읽기

 
머리카락
 
레미 드 구르몽(1858~1915, 프랑스)
 
시몬, 당신의 머리카락 숲 속에는
커다란 신비로움이 숨어 있다.
 
당신은 마른풀 냄새, 짐승이
몸을 쉬고 난 뒤의 돌 냄새가 난다.
당신은 가죽 냄새, 키질한
밀 냄새가 난다.
당신은 장작 냄새, 아침에 배달 오는
빵 냄새가 난다.
당신은 버려진 벽을 따라
피어난 꽃향기가 난다.
당신은 산딸기 냄새, 비에 씻긴
상춘등 냄새가 난다.
당신은 황혼 녘에 벤
등심초와 고사리 냄새가 난다.
당신은 호랑가시나무 냄새, 이끼 냄새가 난다.
당신은 산울타리 그늘에서 계속 열매를 떨어뜨리는
적갈색으로 말라 버린 잡초 냄새가 난다.
당신은 쐐기풀과 금작화 냄새가 난다.
당신은 클로버 냄새, 우유 냄새가 난다.
당신은 회향과 아니스 냄새가 난다.
당신은 호두 냄새, 잘 익은
과일 냄새가 난다.
당신은 꽃이 만발한
버드나무와 보리수 냄새가 난다.
당신은 꿀 냄새, 목장 초원을
산책하는 삶의 냄새가 난다.
당신은 흙과 강 냄새가 난다.
당신은 사랑의 냄새, 불의 냄새가 난다.
 
시몬, 당신의 머리카락 숲 속에는
커다란 신비로움이 숨어 있다.
 
▷「프랑스 명시 77선」(편집부 엮음, 스카이출판사, 2014년) 중에서.
 

2. 냄새를 상상하고 냄새의 시간을 떠올려 보세요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로 시작되는 시 '낙엽'의 시인 레미 드 구르몽(Remy de Gourmont)의 다른 시를 만납니다.

시 '머리카락'입니다.

시의 도입부와 말미에 각각 같이 등장하는 구절을 먼저 만나 봅니다.

'시몬, 당신의 머리카락 숲 속에는 커다란 신비로움이 숨어 있다.'

이렇게 말해 놓고 무려 30가지에 이르는 냄새를 그 사이에 배치해 놓았네요.

시 한 편에 냄새가 많이 등장하는 시로는 아마 일등일 것 같네요.

'시몬'의 '머리카락 숲 속'에 그만큼 많은 냄새가 숨어 있다고 합니다.
 
'커다란 신비로움'. 그 숲은 무엇이 있는지 모를 신비로움이 가득한 곳이네요.
 
화자는 '머리카락 숲'을, 그 숲인 '시몬'을 무척 신비로워하고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몬'은 화자의 연인이겠지요?
 
사랑하는 연인의 머리카락에 코를 묻고 있는 화자입니다.
 
혹은 그녀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곁을 휘익 지나갈 때 나는 냄새를 감지하는 화자입니다. 
 
혹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빗겨주며 사랑을 속삭이는 화자입니다.
 
이렇게 가까이 다가가야 나는 냄새입니다.
 
냄새가 주는 원초적이고도 관능적인 분위기가 시에 가득할 것만 같습니다. 
 
코를 킁킁거리며 시 속으로 더 들어가 봅니다.
 
'당신은 마른풀 냄새, 짐승이 몸을 쉬고 난 뒤의 돌 냄새가 난다.'
 
냄새를 묘사하는 첫 번째 구절에는 두 가지 냄새가 등장하네요.
 
'마른풀 냄새'는 상상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짐승이 몸을 쉬고 난 뒤의 돌 냄새'는 뭘까요?
 
그런 돌에서는 어쩐지 날 것의 냄새, 생명의 냄새가 날 것만 같습니다.
 
이 도입부에서 우리는 '시몬'이라는 여인이 어떤 사람인지 짐작하게 됩니다.
 
도시의 세련되고 연약한 숙녀라기보다는 자연 속의 건강미 넘치는 성숙한 여인일 것 같습니다.
 
'당신은 가죽 냄새, 키질한 밀 냄새가 난다.
당신은 장작 냄새, 아침에 배달 오는 빵 냄새가 난다.'
 
'가죽 냄새'나 '장작 냄새', '빵 냄새'는 우리도 상상할 수 있겠어요.
 
'키질한 밀 냄새'는 방금 수확해 타작한 밀에서 나는 냄새를 말하겠지요?
 
'가죽 냄새'는 야성적인 느낌을 주네요. 
 
'밀 냄새, 장작 냄새, 빵 냄새'. 무언가 편안한 느낌을 갖게 되네요.

그러면서 그 냄새를 더 깊이 흡입하고 싶은 기분이 듭니다. 시인님도 그랬겠지요?
 
'당신은 버려진 벽을 따라 피어난 꽃향기가 난다.
당신은 산딸기 냄새, 비에 씻긴 상춘등 냄새가 난다.'
 
점점 냄새를 상상하기가 어려워지네요.
 
'꽃향기'라도 '버려진 벽을 따라 피어난 꽃향기'라고 하네요.
 
그런 꽃향기에서는 외로움이 느껴지기도 하고요.
 
혹은 그녀는 '버려진 벽'이라도 아름답게 하는 건강한 힘이 있는 걸까,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산딸기 냄새'라고 해놓고 이어 '비에 씻긴 상춘등 냄새'가 따라 나오네요.
 
'상춘등'은 사전에 찾아보니 다른 나무를 감으면서 뻗는 덩굴풀입니다.
 
둘 다 달콤하고 청초할 것 같은 냄새네요.

 

어쩐지 육감적인 느낌이 드는 건 빗방울이네만의 상상일까요?
 

"당신은_사랑의_냄새"-구르몽_시_'머리카락'_중에서.
"당신은 사랑의 냄새"- 구르몽 시 '머리카락' 중에서.

 

3. 이 시의 트리거 '사랑의 냄새'에 대하여

 
'당신은 황혼 녘에 벤 등심초와 고사리 냄새가 난다.
당신은 호랑가시나무 냄새, 이끼 냄새가 난다.'
 
시인의 코는 어찌 이리 정밀한지!
 
'등심초'라도 그냥 등심초가 아니라 '황혼 녘에 벤 등심초'입니다.
 
등심초는 골풀과의 여러해살이풀이라고 하는데, '燈心草'라는 한자어가 마음에 불을 밝히는 풀이라는 뜻이겠네요. 
 
무언가 황혼 녘에 사랑의 무드를 살려주는 풀 냄새일 것만 같습니다.
 
고사리 냄새, 호랑가시나무 냄새, 이끼 냄새. 눈을 감고 이런 냄새들을 떠올려봅니다. 지금 냄새를 맡고 있나요?
 
'당신은 산울타리 그늘에서 계속 열매를 떨어뜨리는 적갈색으로 말라 버린 잡초 냄새가 난다.'
 
아하. 이거 야단 났네요.
 
'잡초 냄새'라면 어느 정도 짐작할 텐데, '적갈색으로 말라 버린 잡초 냄새'라도 희미하게나마 짐작할 텐데요.
 
'계속 열매를 떨어뜨리는' 그것도 '산울타리 그늘에서' 그렇게 하는 잡초 냄새라니! 
 
어쩌다 햇빛 잘 안 드는 그늘에 터를 잡게 된 어떤 풀이, 겨우 열매를 다 맺고 말라버린 그 풀이 풍기는 냄새가 그 연인의 머리카락에서 난다는 건데요.

그 '잡초 냄새'에서 연인의 외로움이 느껴지기도 하고요, 그런 연인을 바라보며 애연해 하는 시인의 시선이 느껴지기도 하고요.
 
시인은 이 구절에서 우리에게 말하는 듯합니다.
 
- 냄새를 상상해 보세요. 냄새를 상상하면서 그 냄새의 시간들을 떠올려 보세요.
 
'당신은 쐐기풀과 금작화 냄새가 난다. 당신은 클로버 냄새, 우유 냄새가 난다. 당신은 회향과 아니스 냄새가 난다.'
 
쐐기풀잎은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금작화는 콩과의 키가 작은 상록나무고요.
 
클로버는 토끼풀, 회향은 여러해살이 풀인데 열매로는 기름을 짜거나 향신료 약재로 쓴다고 합니다.
 
아니스는 미나릿과의 한해살이풀인데 열매의 기름은 약재, 향미료로 쓰입니다.
 
이 모두 우리 삶과 가까이 함께 하는 정다운 자연 속의 키 작은 풀나무 들이네요. 
 
'당신은 호두 냄새, 잘 익은 과일 냄새가 난다. 당신은 꽃이 만발한 버드나무와 보리수 냄새가 난다.
당신은 꿀 냄새, 목장 초원을 산책하는 삶의 냄새가 난다.'
 
다른 냄새는 구체적인 냄새인데, '목장 초원을 산책하는 삶의 냄새'는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냄새네요. 
 
꿀 냄새와 함께 배치한 걸 보면 이 '목장 초원을 산책하는 삶의 냄새'도 달콤한 냄새에 속할 것 같습니다.
 
그런 냄새 안에서는 풀 냄새도 날 것 같고요, 목장 소들의 등을 어루만지며 초원을 가로질러 가는 바람 냄새도 날 것 같네요.
 
초원의 오르막을 오르느라 땀에 베인 살결냄새도 날 것 같아요.
 
이처럼 연인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냄새는 추억의 냄새이겠지요?
 
그녀와 함께 보냈던, 온갖 사랑스러운 시간들의 냄새이겠지요?
 
둘만의 내밀하고도 아찔한 시간들의 냄새이겠지요?
 
그러면 '꽃이 만발한 버드나무 냄새'라도 사람마다 얼마나 다르겠는지요?
 
'당신은 흙과 강 냄새가 난다.'
 
'흙과 강'은 만물을 키우는 어머니입니다.
 
지금 사랑하는 이의 머리카락에 코를 박고 있는 시인님은 어머니의 품속에 얼굴을 박고 있는 기분일 것만 같네요.
 
그런 기분은 얼마나 자유롭고 안전하고 평화로운 기분이겠는지요? 
 
자, 냄새가 등장하는 구절의 마지막 부분을 음미해 봅니다.
 
'당신은 사랑의 냄새, 불의 냄새가 난다.'
 
이 구절의 원문은 이렇습니다.
 
'Tu sens l'amour, tu sens le feu'  
 
'사랑'이라고 번역된 'l'amour'는 'amour' 앞에 정관사 'la'가 붙은 축약형입니다.
 
그러니 그냥 '사랑'이 아니라 정확히는 '그 사랑'입니다. 정관사의 기본 기능이 지시성이니까요.
 
시인과 연인 '시몬' 사이에서 둘 만이 아는 '그 사랑'은 무엇일까요?
 
프랑스어 'faire l'amour'는 '사랑을 나누다, 정사(情事)를 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냄새'라는 구절은 다른 번역본에서는 '정사의 냄새'라고 옮겨지기도 합니다.
 
'Tu sens l'amour'
 
그러니 이 냄새가 추상적인 사랑의 냄새가 아니라 사랑의 행위 후 화자가 후각으로 느낀 짙은 여운을 말한다고 새겨집니다.

정관사 'la' 하나는 이 시의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 같은 존재네요. 작지만 그 파문은 시 전체로 번져가네요.
 
그리하여 마지막 이 구절에서 격정적인 에너지가 최고조에 달하는 것만 같습니다.
 
'불의 냄새가 난다.'
 
두 사람만의 소중한 사랑이 얼마나 뜨거웠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만 같습니다.
 
이 사랑, 냄새로 풀어본 이 사랑은 참 특별하네요.

밀한 관능미가 스민, 열정과 생명력이 충만한 사랑이네요.
 
시 ‘머리카락‘은 냄새마다 두 사람만이 아는 뜨거운 이야기들이 묻어 있는 시였네요.
 
그대는 연인에게서 몇 가지 냄새를 떠올릴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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