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환 시인님의 시 '세 사람의 가족'을 만나 봅니다.
이 시에는 어떤 '비밀 코드'가 숨어 있을까요?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박인환 시 '세 사람의 가족' 읽기
세 사람의 가족(家族)
박인환(1926~1956년, 강원도 인제)
나와 나의 청순(淸純)한 아내
여름날 순백(純白)한 결혼식(結婚式)이 끝나고
우리는 유행품(流行品)으로 화려(華麗)한
상가(商街)의 쇼오위인드를 바라보며 걸었다.
전쟁(戰爭)이 머물고
평온(平穩)한 지평(地平)에서
모두의 단편적(斷片的)인 기억(記憶)이
비둘기의 날개처럼 솟아나는 틈을 타서
우리는 내성(內省)과 회한(悔恨)에의 여행(旅行)을 떠났다.
평범(平凡)한 수획(收獲)의 가을
겨울은 백합(百合)처럼 향(香)기를 풍기고 온다.
죽은 사람들은 싸늘한 흙 속에 묻히고
우리의 가족(家族)은 세 사람.
톨소에 그늘 밑에서
나의 불운(不運)한 편력(遍歷)인 일기책(日記冊)이 떨고
그 하나하나의 지면(紙面)은
음울(陰鬱)한 회상(回想)의 지대(地帶)로 날아갔다.
아 창백(蒼白)한 세상(世上)과 나의 생애(生涯)에
종말(終末)이 오기 전(前)에
나는 고독(孤獨)한 피로(疲勞)에서
빙화(氷花)처럼 잠들은 지나간 세월(歲月)을 위해
시(詩)를 써 본다.
그러나 창(窓) 밖
암담(暗澹)한 상가(商街)
고통(苦痛)과 구토(嘔吐)가 동결(凍結)된 밤의 쇼오위인드
그 곁에는
절망(絶望)과 기아(飢餓)의 행렬(行列)이 밤을 새우고
내일(來日)이 온다면
이 정막(靜寞)의 거리에 폭풍(暴風)이 분다.
▷「박인환 선시집(朴寅煥 選詩集)」(산호장, 1955년) 중에서.
※ 「박인환 선시집(朴寅煥 選詩集)」은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 자료를 통해 열람한 시집입니다.
위에 인용된 시 '세 사람의 가족'은 이 원본 시집의 시에서 한자를 괄호 속에 넣은 것 말고는 모두 원본 그대로입니다.

2. 박인환 첫 시집 첫 시는 '세 사람의 가족'
한 잔의 술을 마시고 / 우리는 바-지니아·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 박인환 시 '목마와 숙녀' 중에서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 그의 눈동자 입술은 / 내 가슴에 있어
▷ 박인환 시 '세월이 가면' 중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시들을 우리에게 남겨주신 박인환 시인님의 시 '세 사람의 가족'을 만납니다.
시 '세 사람의 가족'은 시인님의 첫 시집이자 생전에 남긴 유일한 시집 「박인환 선시집(朴寅煥 選詩集)」의 첫 번째로 실린 시입니다.
시집을 열면 처음 만나는 첫 시에는 시인님의 특별한 속마음이 담겨있을 것만 같습니다.
시집에는 모두 59편의 시가 실렸는데, 그 배치 순서에 대해 시인님이 직접 언급한 문장이 있습니다.
집필 연월순도 발표순도 아니며, 단지 서로의 시가 가지는 관련성과 나의 구분해 보려는 습성에서 온 것
▷ 「박인환 선시집(朴寅煥 選詩集)」에 실린 박인환 시인의 '후기(後記)' 중에서
이 문장에서 우리는 시집에 실린 시의 순서를 정하는데 시인님이 상당한 정성을 기울였다는 것을 알 수 있네요.
시집 제목인 「박인환 선시집(朴寅煥 選詩集)」도 '가려 뽑은 시들'의 시집이라는 뜻입니다.
박인환 시인님은 20세 때인 1946년 「국제신보」에 시 '거리'를 발표하며 등단했습니다.
나는 십여 년 동안 시를 써왔다.
▷ 위의 「박인환 선시집」의 같은 '후기' 중에서.
이 문장에 비추어 이 시집은 등단(1946년) 후 10여 년만에 나온(1955년) 시집입니다.
그처럼 소중한 시집의 첫 번째 시, 시인님의 고심 끝에 선정됐을 시가 '세 사람의 가족'이네요.
그런 만큼 이 시는 시인님에게 각별한 시라는 뜻입니다.
그런 점에서 거기에 무언가를 암시해 두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대도 앞에서 시를 일별 하셨겠지만, 그런데 이 시에서 그런 무언가를 찾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과연 시인님은 이 시에 무엇을 숨겨 두었을까요?
3. '세 사람의 가족'이라는 구절에 숨어 있는 것은?
시 '세 사람의 가족'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이겠지만 오늘은 '독서목욕'이 낸 오솔길을 따라가 봅니다.
1 연부터 만납니다.
'나와 나의 청순(淸純)한 아내 / 여름날 순백(純白)한 결혼식(結婚式)이 끝나고
우리는 유행품(流行品)으로 화려(華麗)한 / 상가(商街)의 쇼오위인드를 바라보며 걸었다.'
1 연에 등장하는 '결혼식'은 시인님(22세)의 결혼식일 것입니다.
시인님의 결혼식에 대한 흥미로운 문장을 읽어 봅니다.
그들의 결혼식은 박인환의 취향대로 꽤나 멋을 부린 것이었다.
장소를 덕수궁 석조전으로 하고, 창경원 식물원의 생화를 꺾어다
부케를 만든 것 등은 그 작은 일례에 불과하다.
▷ 「박인환 평전 - 목마와 숙녀와 별과 사랑」(이동하 편저, 문학세계사, 1986년) 중에서.
아름답고 성대한 결혼식이었네요.
'여름날 순백한 결혼식'. 시인님은 1948년 4월 결혼했는데, 그날은 '여름날'처럼 찬란하고 환한 날이었을까요?
위 평전에 따르면, 시인님은 '대단히 가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으며' '결혼생활은 가난에도 불구하고 무척 따뜻하고 행복'했다고 합니다.
이들의 청순하고 순백한 결혼식, 여느 결혼식과 마찬가지로 꿈과 희망으로 설레는 시간이었겠습니다.
'전쟁(戰爭)이 머물고 / 평온(平穩)한 지평(地平)에서
모두의 단편적(斷片的)인 기억(記憶)이 / 비둘기의 날개처럼 솟아나는 틈을 타서
우리는 내성(內省)과 회한(悔恨)에의 여행(旅行)을 떠났다.'
2 연에 등장하는 '전쟁'은 세계 2차 대전(1939~1945)과 태평양전쟁(1941~1945)으로 새깁니다.
그전에 일본은 이미 1931년 만주를 침입해 만주국을 세웠고, 1937년에는 중일전쟁이 발발했습니다.
그 어두운 시간 속을 오롯이 건너온 시인님(1926~1956)이네요.
일제강점기의 억압과 공포, 거기에 일본이 일으킨 각종 전쟁의 트라우마, 해방 후 빚어진 전쟁 같은 좌우 대립과 사회 혼란 ···.
그 속에서 시인님의 삶은 우울과 불안, 절망으로 가득 채워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내성(內省)과 회한(悔恨)에의 여행(旅行)을 떠났다'
2 연의 이 마지막 구절을 음미하면서 아래 문장을 겹쳐 읽어봅니다.
결혼이 이루어졌다면 장래에 대해, 피차의 상대에 대해, 가정에 대해,
경제적인 문제에 대해 진실한 상의와 비판을 서로가 가져야만 될 것이다.
결혼 일 개월간은 계획의 시기에 지금까지 독신자로서 걸어왔던 것에 대한 참다운 반성의 시기여야만 한다...
앞으로 애정을 유지해 가기 위해 서로가 계획하고 검토를 해야만 한다...
▷ 「박인환 전집」(맹문재 엮음, 실천문학사, 2007년)에 실린 박인환 산문 '꿈같이 지낸 신생활' 중에서.
결혼에 대한 시인님의 생각이 담긴 아주 흥미로운 문장입니다.
결혼 초기에는 서로 '상의'하고 '비판'하고 '반성'하고 '계획'하고 '검토'해야 한다고 하네요.
그 과정이 2 연에 등장하는 '내성과 회한에의 여행'일까요?
'평범(平凡)한 수획(收獲)의 가을 / 겨울은 백합(百合)처럼 향(香)기를 풍기고 온다.
죽은 사람들은 싸늘한 흙 속에 묻히고 / 우리의 가족(家族)은 세 사람.'
이 시에서 가장 수수께끼 같은 구절이 3 연에 등장하는 '우리의 가족은 세 사람'입니다.
이 시의 제목도 '세 사람의 가족'입니다.
그만큼 시인님이 강조하는 구절인데, 그렇게 강조하는 까닭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네요.
왜 '세 사람의 가족'이며, 누구누구를 말하는 걸까요?
시 전체를 샅샅이 뒤져도 그 단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우리의 가족은 세 사람'이라고만 해 두었을까요?
먼저 이 시의 시간적 무대를 떠올려 봅니다.
1연에 등장한 '결혼식', 3연의 '평범한 수획의 가을' '싸늘한 흙' 등의 구절로 보아 이 시의 시간적 무대는 1948년(결혼식) 늦가을 즈음일 것입니다.
그러면 당시 시인님의 가족 구성원은 두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의 가족은 세 사람'이라고 한 걸까요?
「박인환 깊이 읽기」(맹문재 편, 서정시학)에 실린 연보를 살펴봅니다.
이에 따르면 박인환 시인님은 1948년 4월 덕수궁에서 결혼합니다.
그리고 그해 12월 8일 장남 세형이 출생했습니다.
그러니 이 시의 시간 무대인 결혼식 해의 늦가을 즈음, 시인님의 가족은 세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시인님과 아내,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당시 뱃속의 '태아'였겠습니다.
이런 추론은 문득 이 시를 한없이 부풀게 하여 저 높은 공중으로 들어 올려주네요.
'겨울은 백합(百合)처럼 향(香)기를 풍기고 온다.'
시인님은 새 생명이 세상 밖으로 나올 겨울을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암담하고 혼란한 시간 속에서도 '백합'처럼 순수하고 순결한 생명은 온다고 합니다.
'톨소에 그늘 밑에서 / 나의 불운(不運)한 편력(遍歷)인 일기책(日記冊)이 떨고
그 하나하나의 지면(紙面)은 / 음울(陰鬱)한 회상(回想)의 지대(地帶)로 날아갔다.'
이 4 연에 나오는 '톨소'는 '토르소'로 새깁니다.
토르소(torso)란 머리와 팔다리 없이 몸통만으로 된 조각상을 말합니다.
인체미의 순수성을 추구하기 위해 생략의 방법으로 토르소를 상징적인 표현으로 사용합니다.
이 4 연의 '톨소'에서 머리와 팔다리가 다 잘린 극한의 참담함의 상징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또한 순수성을 추구했으나 늘 절망해야 했던 시인님의 '불운한 편력'이 느껴지기도 하고요.
'아 창백(蒼白)한 세상(世上)과 나의 생애(生涯)에 / 종말(終末)이 오기 전(前)에
나는 고독(孤獨)한 피로(疲勞)에서 / 빙화(氷花)처럼 잠들은 지나간 세월(歲月)을 위해 / 시(詩)를 써 본다.'
5 연에 등장한 '빙화(氷花)'는 식물에 수분이 얼어붙어 흰 꽃처럼 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빙화처럼 잠들은 지나간 세월'. 지금은 얼어붙어 있다고 할지라도 새날 새봄이 오면 깨어날 것입니다.
시인님은 '고독한 피로'를 견디며 그 삶의 봄날을 위해 시를 쓴다고 합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내가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 것이었다.
▷ 「박인환 선시집」에 실린 박인환 시인의 '후기(後記)' 중에서
이 격정 같은 시인님의 토로를 겹쳐 읽으니 5 연의 '시를 써 본다'는 구절이 한없이 애절하고 또한 간절하네요.
이 시의 마지막 6 연을 만납니다.
'그러나 창(窓) 밖 / 암담(暗澹)한 상가(商街)
고통(苦痛)과 구토(嘔吐)가 동결(凍結)된 밤의 쇼오위인드
그 곁에는 / 절망(絶望)과 기아(飢餓)의 행렬(行列)이 밤을 새우고
내일(來日)이 온다면 / 이 정막(靜寞)의 거리에 폭풍(暴風)이 분다.'
암담, 고통, 구토, 절망, 기아 ···.
이 시는 마지막 연에 이르러 깜깜한 어둠이 가득하네요.
이렇게 깜깜하고 막막하고 고통스럽게 시는 끝나고 마는 것일까요?
그럴 리 없습니다. 시인님은 그런 절망적인 공간에 우리를 버려두고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깜깜한 어둠 속에 아주 여린 한 가닥 '빛'이 보이니까요.
'우리의 가족은 세 사람'
맞습니다. 바로 생명입니다. 새로운 날을 열어갈, 새로 태어날 생명입니다.
'내일(來日)이 온다면 / 이 정막(靜寞)의 거리에 폭풍(暴風)이 분다.'
그렇게 태어날 고귀한 생명이 있기에 우리는 아무리 힘든 '고통'과 '구토'라도 오늘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벼랑 같은 '절망'과 '기아'를 덮어버릴 '백합의 향기' 같은 순수한 생명이 오고 있기에 우리는 오늘에 멈출 수 없습니다.
그런 '내일'의 '폭풍'들은 '정막의 거리'의 정적과 고독을 쓸어버리고 세상을 '청순'과 '순백'의 시간들로 채워갈 것이니까요.
'빙화(氷花)처럼 잠들은 지나간 세월(歲月)을 위해 / 시(詩)를 써 본다.'
그런 '폭풍'의 시간을 기다리며 '빙화처럼 잠들은' 시간을 깨우기 위해 '시'를 쓴다는 시인님은 얼마나 고마운지!
시인님이 첫 시집에 이 시를 맨 앞자리에 놓게 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박인환 시인님의 시를 더 만나 보세요.
박인환 시 목마와 숙녀
박인환 시인님의 시 '목마와 숙녀'를 만납니다. 이 시는 널리 애송되는 대표적인 낭송시입니다. 감정을 살려 천천히 낭송해 보면서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박인환 시 '목마와 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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