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읽고 쓰고 스미기

백석 시 고향 원문 해설 감상

by 빗방울이네 2026. 2. 16.
반응형

백석 시인님의 시 '고향(故鄕)'을 원문으로 만나 봅니다.
 
굳고 마른 '나'를 물컹물컹 만져주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백석 시 '고향(故鄕)' 원문 읽기

 
故鄕
 
백석(1912~1995년, 평북 정주)
 
나는 北關에 혼자 앓어누어서
어늬 아츰 醫員을 뵈이었다
醫員은 如來 같은 상을 하고 關公의 수염을 들이워서
먼 녯적 어늬 나라 신선 같은데
새기손톱 길게 도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집드니
문득 물어 故鄕이 어데냐 한다
平安道 定州라는 곧이라 한즉
그렇면 아무개 氏 故鄕이란다
그렇면 아무개 氏-ㄹ 아느냐 한즉
醫員은 빙긋이 우슴을 띄고
莫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쓸ㄴ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醫員은 또다시 넌즛이 웃고
말없이 팔을 잡어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故鄕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백석 시선」(정철훈 엮음,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년) 중에서.


※ 위의 푸른 글자 '쓸ㄴ다'는 시 원문에서 'ㄹㄴ'이 붙어 '쓰'의 받침으로 쓰였습니다.

 

2. 낯선 타지에서 혼자 아파 병원에 가다

 
백석 시인님의 시 '고향(故鄕)'은 1938년 4월 「삼천리문학」 2호에 발표된 시입니다.
 
시인님 27세 때네요.
 
이때(1938년)는 시인님이 연모하던 통영 처녀가 하필이면 시인님의 절친과 결혼(1937년) 한 1년 뒤쯤입니다.
 
또 이 때는 서울의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1936년) 외진 함경도 함흥에서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생활할 때였습니다.
 
실연의 아픔과 객지의 외로움이 시인님의 내면에 켜켜이 쌓이던 시간이겠습니다.
 
누구라도 이런 시간이라면 몸과 마음의 한 구석이 허물어지지 않겠는지요?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어누어서 / 어늬 아츰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북관(北關)'은 함경도를 말합니다. 외지고 낯선 곳이네요.
 
빗방울이네도 외지고 낯선 곳에서 혼자 아프면 더 아프고 더 서럽습디다.
 
그래서 '어느('어늬') 아침('아츰')'에 시인님은 한의원을 찾아갔네요. 
 
'의원(醫員)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들이워서 / 먼 녯적 어늬 나라 신선 같은데'
 
'여래(如來)'는 '부처'를 칭하는 말입니다.
 
'관공(關公)'은 관우(관운장)를 말합니다.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무장으로 유비, 장비와 의형제를 맺은 인물입니다. 긴 수염이 이 분의 캐릭터이고요.
 
얼굴이나 체격이 부처 같은 모습('상')을 하고 관우처럼 수염을 기르고 있는 한의사 앞이라면 어떤 느낌일까요?
 
그 모습이 '먼 옛적('녯적') 어느('어늬') 나라 신선' 같다고 합니다.
 
그 범상치 않은 신비스러운 풍모에 압도되어 다소 어리둥절한 마음이었겠습니다.
 
'새기손톱 길게 도은 손을 내어 /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집드니'
 
'새끼('새기')손톱 길게 돋은('도은') 손을 내어'. 이렇게 드문 새끼손가락 손톱이 시인님의 눈에 쑥 들어왔네요.
 
어쩐지 이 의원은 낯설고 독특한 스타일리스트 같은 인상을 풍기네요. 
 
한의원에 가면 먼저 손목의 맥을 짚어 병을 진찰하는 '진맥(診脈)'을 합니다.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집드니')'. 진맥 하느라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네요. 
 
'요골동맥'이라는 손목의 맥박을 짚어서 그 맥박의 속도나 강약의 정도를 보고 환자의 상태를 파악한다고 합니다.
 
보통 1분 정도 진맥한다고 하니, 그 사이 의원은 환자의 내면에 들어가 살피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 때는 환자도 의원의 체온을 느끼게 되니 두 사람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시간이네요.
 
그다음에는 어떤 일이 펼쳐질까요?
 

"말없이_팔을_잡어_맥을_보는데"-백석_시_'고향'_중에서.
"말없이 팔을 잡어 맥을 보는데" - 백석 시 '고향' 중에서.

 

3. '고향', 그 따스함과 부드러움 속으로 ···

 
묵묵하니 맥을 짚고 있던 의원이 시인님에게 문득 말을 건넸네요.
 
'문득 물어 고향(故鄕)이 어데냐 한다'
 
부처 같은 상을 하고 관우처럼 수염을 기른, 위엄이 넘치는 외모의 의원이 묻었네요.
 
- 고향이 어디인가? 
 
우리가 누군가의 고향을 물어볼 때 그 사람의 말투를 보고 고향이 어디인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의원도 시인님의 고향을 점치고 있었겠지요?
 
앞서 자신에게 아픈 증세를 말하던, 환자로 온 시인님의 말투에서 말입니다.
 
'평안도(平安道) 정주(定州)라는 곧이라 한즉 / 그렇면 아무개 씨(氏) 고향(故鄕)이란다'
 
시인님은 '평안도 정주'가 고향이라고 답합니다.
 
그러니 의원은 '그렇다면('그렇면') 아무개 씨(氏) 고향(故鄕)'이라고 말했네요.
 
시에서는 '아무개'로 이름을 숨겼지만, 이 '아무개'는 금광을 발견해 갑부가 된 '평안도 정주' 출신 '금광왕' 방응모를 가리킨다고 새겨집니다.
 
의원의 말소리가 들리는 듯하네요. 이렇게요.
 
- 그렇다면 방응모 씨 고향이로군!
 
'그렇면 아무개 씨(氏)-ㄹ 아느냐 한즉 / 의원(醫員)은 빙긋이 우슴을 띄고 / 막역지간(莫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쓸ㄴ다'
 
시인님이 이렇게 반문했네요. 
 
- 그렇다면 의원님이 '방응모'라는 분을 아시는지요? 
 
자신도 역시 '방응모'를 잘 알고 있는, 시인님의 이 반문에서 반가움과 안도감이 물씬 느껴지네요.
 
'의원은 빙긋이 웃음('우슴')을 띠고('띄고'). 이 웃음에서 이 지문이 느껴지네요.
 
- 아, '방응모'를 잘 아는 청년구나.
 
그러면서 의원은 '막역지간(莫逆之間)'이라면서 '수염'을 한번 쓱 쓸었다고 합니다('쓸ㄴ다' → 쓴다).
 
이 장면에서 마음이 물컹 뜨거워지네요. 
 
내가 아는 사람, 특히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을 함께 아는 사람을 만나면 얼마나 좋은지요?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 의원(醫員)은 또다시 넌즛이 웃고'
 
시인님은 그분(방응모)을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고 답했네요.
 
어떤 사연일까요?
 
(백석은 1930년) 「조선일보」 신년현상문예에 당선되었다.
정주 출신 방응모가 설립한 춘해장학회의 장학생으로 뽑혀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영어사범과에 입학했다.

▷ 「백석 평전」(안도현 지음, 다산북스, 2014년)의 '백석 연보' 중에서.

 
그러니 시인님은 평소 '방응모'를 '아버지'처럼 존경하고 따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의원(醫員)은 또다시 넌지시('넌즛이') 웃고'. 이 드러나지 않게 가만히 웃는 웃음은 참 좋은 웃음이네요.
 
믿고 의지해도 좋다는 말,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네요.
 
이런 웃음을 건네주는 이라면 그 속에 풍덩 뛰어들어도 되는 푹신한 목화솜 같은 존재이겠습니다. 
 
그리하여 의원과 시인님, 두 사람 마음의 간격은 빈틈없이 딱 붙어버렸겠습니다.
 
'말없이 팔을 잡어 맥을 보는데 /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 고향(故鄕)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요?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과 절친인 분이니 '잘 부탁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류의 말은 하등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와 '의원'은 지금 '아무개 씨'라는 존재를, 저마다 좋아하고 존경하는 존재를 공유하며 합쳐져 있습니다.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끼리 깊이 교감하며 서로 혼연일체가 되는, 참으로 아름다운 순간이네요.
 
'손길을 따스하고 부드러워'
 
이렇게 시인님은 의원에게 팔목을 내맡긴 채 의원의 체온을 묵묵히 느끼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다소 낯선 '새기손톱 길게 도은 손'으로 다가왔지만, 지금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마음도 몸도 편안하고 평화로운 손길이겠습니다.
 
'고향'이란 그런 곳이겠지요?
 
멀리 떠났을 때 느끼는 것, 무언가 잃었을 때 다가오는 것, 잊고 있다가 이렇게 누군가 불쑥 일깨워주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다가와 정수리부터 더운물을 부어서 나의 굳은 몸과 마음을 물컹물컹 마사지하고 풀어주는 그런 것요.
 
'아버지도 아버지 친구도' 그런 존재이겠지요?
 
시 '고향'은 참으로 따스하고 부드러운 기운을 주는 더운 목욕물 같은 시네요.
 
몸과 마음이 얼 때마다 한 번씩 '고향'을 꺼내 가만히 읽어보아야겠어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백석 시인님의 시를 더 만나 보세요.

 

백석 시 남행시초(2)-통영 원문 해설 감상

백석 시인님의 시 '남행시초(2)-통영'을 만납니다.머리에 갓을 쓰고 통영장을 기웃대는 서울 청년 백석이 보이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1. 백석 시 '남행시초

interestingtopicofconversation.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