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목욕'이 숲속에 사는 도토리거위벌레에게 편지를 띄웁니다.
이 계절, 도토리거위벌레에게 빠져 얼마나 행복했는지!
그대 숲속에 가신다면 부디 이 편지를 도토리거위벌레에게 전해주시길!
1. 상수리나뭇가지가 바닥에 수북한 까닭은?
지난 토요일 쇠미산을 오르는 길에 우리는 만났지.
그 등산로 입구, 체육공원 바닥에 수북히 쌓인 상수리나뭇가지들.
그 나뭇가지들을 보면서 도토리거위벌레, 너를 생각하는 일은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
그 나뭇가지들이 달려있던 아득한 곳을 올려다보며, 그 높은 곳에 있을 너에게 찡긋 윙크를 보내는 일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나는 너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이렇게 오래 사귄 친구처럼 설레고 정답구나!
이 나뭇가지를 네가 직접 잘라 땅으로 떨어뜨렸다는 사실은 이 숲속의 정령들은 다 알고 있는 일이었으리.
도토리에 구멍을 내어 그 속에 너의 알을 밀어넣고 그 도토리가 달린 나뭇가지를 잘라 땅으로 내려보낸 일 말이다.
그것도 잎사귀가 대여섯개 달린 나뭇가지를 골라 그 가지를 잘라낸 놀라운 너의 안목에 나는 온 가슴이 다 두근두근하는구나.
너는 어떻게 알았을까?
잎사귀들이 여러 장 달린 나뭇가지는 천천히 빙그르 돌며 땅바닥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을!
그러면 그 나뭇가지에 달린 도토리, 그 도토리 속의 너의 아가는 충격없이 부드럽게 땅에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이런 사실을 다 알고 있는 네가 나는 참으로 신비롭구나.
누가 너에게 이런 소중한 팁을 알려주었니? 네 엄마 아빠가 알려주었니?
나는 그런 네가 너무 좋고 궁금하여 이 세상의 도서관을 다 뒤지고 싶었단다.

2. 너는 비밀이 많아서 더 좋은 친구야!
알고보니 너는 내가 좋아하는 딱정벌레의 사촌이더구나.
「세상의 모든 딱정벌레」(패트리스 부샤르 엮음, 김아림 옮김,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18년)를 보니, 지구상에 존재하는 전체 동물종 가운데 4분의 1(387,100종)이 딱정벌레라더군. 세상에!
이처럼 거대한 대가족의 일원인 너는 참으로 든든하겠구나. 인간이 속한 포유류는 5,490종이라니 너의 가족에 비할 바 못 되겠고.
너와 같이 딱정벌레목에 속한 물방개, 풍뎅이, 사슴벌레, 소똥구리, 방아벌레, 반딧불이, 무당벌레, 하늘소 같은 친구들이 너의 사촌들이라는 생각을 하니 네가 더욱 살갑게 느껴지는구나.
나는 네 이름이 왜 도토리거위벌레인지 궁금하였단다.
도토리를 먹고 사니까 이름에 '도토리'라는 단어가 붙었겠는데, 거기에 '거위'는 왜?
아마 너의 긴 주둥이 때문일 것 같구나. 몸통보다 길어보이는 너의 주둥이로 인해 마치 거위가 뒤뚱거리는 모습 같아서였을까?
그런데 너의 주둥이는 왜 그리 기다랗는데? 어떤 소중한 일에 쓰려는 듯이, 나름 용도가 다 있다는 듯이 길고 길구나.
EBS 명작다큐 '도토리거위벌레 편'을 보니, 너의 그 기다란 주둥이는 한 마디로 '구멍을 뚫는 드릴'이더구나.
네가 그 주둥이로 가지를 자르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나는 아! 하고 아이처럼 탄성을 질렀단다.
주둥이로 먼저 가지의 표면을 뚫고 거기에 주둥이를 밀어넣어 드릴처럼 점점 공간을 넓혀가는 너의 노동!
그렇게 반쯤 가지를 자르고는 그 가지에 달린 도토리로 이동해 도토리 모자에 구멍을 내더구나.
너의 주둥이 길이만큼의 깊이로 구멍을 내고서는 거기에 너의 알을 낳았지.
그리고는 다시 아까 자르던 가지로 와서 나머지를 자르기 시작하더구나.
가지를 반쯤 자르고, 도토리에 알을 낳고, 다시 가지로 와서 나머지를 자른 것은 왜였니?
먼저 알을 낳고 와서 가지를 자를 수도 있었을텐데?
힘들게 알을 낳고 나면 가지를 한번에 자를 힘이 달려서였니?
이렇게 가지 하나를 자르고 도토리에 구멍을 뚫는 데 서너시간이나 걸린다고 하니 이 여름날 너는 참으로 수고가 많구나.
드디어 다 잘린 가지, 너의 아가를 품은 도토리의 가지가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지.
빙그르 빙그르 빙그르 ···.
그렇게 공중에서 수없이 회전하며 떨어지는 나뭇가지 낙하산!
그렇게 무사히 땅에 도착한 네 아가는 도토리를 먹으며 자라나 땅속으로 들어가 겨울을 나게 된다는구나.
도토리거위벌레야.
그렇게 나뭇가지 낙하산으로 떨어지면 네 아가의 요람은 무사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나에게 제발 알려다오.
그리고 이것도 부디 알려다오.
풋도토리에는 다람쥐도 사람도 관심없다는 것, 그래서 네 아가가 그 속에서 안심하고 풋도토리 과육을 먹으며 잘 자랄 수 있다는 것을 어찌 알았는지도.
너는 참으로 짙은 베일에 쌓인 친구로구나!
너의 비밀은 세상의 도서관을 다 뒤져도 결코 알아낼 수 없는 것이리라!
너는 참으로 비밀이 많은 친구여서 나는 이렇게 설레고 좋구나.
3. 도토리거위벌레 최초의 초상화를 그리다
이렇게 내가 모르는 것이 세상에 많다는 것을 새삼 환기시켜준 너로구나.
그 답례로 나는 너의 초상화를 그려 간직하려고 한다.
몸길이 7.0~10.5mm. 몸색깔은 흑색 내지 암갈색이고 광택이 난다.
날개에 회황색의 털이 밀생해 있고, 흑색의 털도 드문드문 나 있으며,
날개의 길이와 비슷할 정도로 긴 주둥이를 가지고 있다.
더듬이는 11마디이고, 선단 3마디부터 팽대되어 있다.
▷ 「한국곤충대도감」(박규택 등 지음, 지오북, 2012년) 중에서.
나는 너의 사진을 보며 암갈색의 광택이 나는 아름다운 너를 화폭에 그린다.
너의 둥근 눈부터 기다란 주둥이, 그리고 갈퀴가 달린 발과 털이 많은 몸을!
결코 잊지 않으려는 듯 꼼꼼히 들여다보면서.
그렇게 너의 구석구석을 더듬으며 천천히 너를 그리고 있으니 나는 너와 무척 친해지는 느낌이었단다.
그러면서 나는 지난날을 돌아보게 되구나.
너와 친하지 않았을 때, 등산로에 수북한 도토리 나뭇가지들을 함부로 발로 찼던 때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떠올리기 힘든 상상이지만, 소중한 너의 아가가 잠든 도토리인 줄도 모르고 발로 밟았을 수도.
아니, 누가 도토리 속까지 다 파먹어버렸네, 하면서 너의 아가를 원망했던 때도 있었으리라.
나는 얼마나 모르는 일이 많은지! 그러면서 어찌나 어깨에 힘을 주고 살았는지!
너의 존재를 알고나니 너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 지구별이 더 넓어지고 정다워진 것만 같단다.
그런데 말이야, 나의 손톱보다 작은 도토리거위벌레야.
너는 너만의 '도토리 낙하산 육아법'을 정말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나에게 살짝 알려주면 안 되겠니?
뭐라고?
그건 너를 더 사랑해서 지금보다 더 친해지는 수밖에 없다고?
알겠어~.
그럼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ps. 지금 구청 해충방제과에서 눈여겨 보고 있으니 숲속의 도토리가지를 너무 많이 자르지 않도록 주의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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