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신경림 시인님의 시 '파장'의 첫 구절은 따뜻하고도 슬픈 구절이네요.
황폐해진 농촌의 현실, 소외된 이들의 고단한 삶을 묵직하게 고발하는 시, 신경림 시인님의 '파장'을 깊이 있게 읽어봅니다.
신경림 시 '파장(罷場)' 전문 읽기
罷場
신경림(1936~2024년, 충북 청주)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1970 · 창작과 비평)
▷신경림 시집 「농무(農舞)」(창작과 비평사, 1975년 증보판의 1989년 9판) 중에서

시 제목 '罷場(파장)'의 뉘앙스에 대하여
오늘 함께 감상할 신경림 시인님의 시 '罷場'은 시인님 첫 시집 「농무(農舞)」에 실린 시입니다. 도서관에서 시집을 찾아 펼쳐보니 이 시집의 다섯 번째로 실린 시인데, 시의 맨 아래에 '(1970 · 창작과 비평)'이라고 적혀 있네요.
1970년 문예지인 「창작과 비평」에 처음 발표한 시라는 말입니다. 그때는 시인님 34세 즈음이네요.
알려진 대로, 시인님은 우리 모두 사랑하는 시 '갈대'로 등단(1956년)한 이후 갑자기 문단(文壇)을 떠났습니다. 당시의 문학과 문단에 환멸을 느낀 20세 청년 신경림은 절필(絶筆) 후 10여 년 간 전국을 방랑했습니다.
그렇게 떠돌면서 만난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고단하고 가난한 삶을 뜨거운 시로 엮어 세상에 알린 것이 시집 「농무(農舞)」입니다. 시 '罷場(파장)'도 그런 뜨거움이 꿈틀거리는 시네요.
제목 '罷場'은 마칠 '罷(파)', 마당 '場(장)'자를 씁니다. 이는 5일장 같은 시장(市場)이나 백일장 따위가 끝났음을 뜻하는데요. 단순히 장이 끝났다는 의미를 넘어 '모든 것이 끝났다', '끝장이 나버렸다'라고 한탄하는 자조적이고 비판적인 뉘앙스가 깊게 느껴지는 제목입니다.
'파장'은 그 당시 시인님이 방랑하면서 직접 부대끼며 겪은 농촌 현실을 말하겠네요. 급격한 도시화 산업화 물결에 소외되어 황폐해진 농촌 현실을 시인님은 '파장'이라는 두 글자에 압축해 담았네요.
시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첫 구절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에 대하여
빗방울이네가 짝꿍 풀잎에게 시 '파장'의 첫 구절을 읽어주었습니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 구절을 듣고 난 풀잎이 "풉, 흐흐흐 ······." 하면서 한동안 웃더니 이랬습니다. "정말 재미있는 구절이네요. 어쩐지 슬프기도 하고요."
아마 풀잎은 어떤 '못난 놈'이 다른 어떤 '못난 놈'을 마주 보는 장면을 떠올린 듯했습니다. 그러면 각자 얼마나 웃기겠는지요? 사람이 어찌 저리 생겼을꼬!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요. 자기도 못 생겼으면서 말입니다.
여기서 아주 기묘한 마음이 작동합니다. 못난 상대방이 주는 편안한 말입니다. 같이 못난 입장에서 느끼는 동질감과 위안 말입니다. 그리고 난 뒤 풀잎은 왜 슬퍼졌을까요?
이 시속의 '못난 놈들'은 '잘난 놈들'이 아닌 사람들을 말합니다. '잘난 놈들'은 잘 사는 사람, 출세한 사람,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 기름기 자르르 흐르는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네요.
그러면 '못난 놈들'은 가난한 사람, 헐벗은 사람, 낮은 사람, 힘없고 백 없는 사람, 소외된 사람이네요. 그 '못난 놈들'의 삶이니, 기구한 삶이니 서러움이 일 수밖에요.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그런데 그런 '못난 놈들'이 만나면 왜 '흥겹다'라고 할까요? '못난 놈들'은 서로에게 아무 꾸밈이나 숨김이 없겠습니다. 잘난 체하지 않고, 경쟁하지 않고, 뺏으려 하지 않겠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서로 똑같이 모자라고 힘없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서로가 잘 알고 있으니까요. 이 깊은 유대 속에서는 분열이나 갈등 없는, 정직한 편안함이 있겠습니다. 그러니 서로 '얼굴만 봐도' 얼마나 반갑고 흥겹겠는지요?
신경림 '파장' 속 흥겨운 만남과 가혹한 농촌 현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시장 한편에 자리 잡은 '이발소'의 '앞'은 요즘의 '만남의 광장'이었네요. 그동안 농사일에 바빠 못 만나던 농민들이 시장에 오면 으레 모이는 곳요.
여름날이네요. 거기서 제철 과일('참외')도 깎아 나눠먹으며 서로의 안부도 묻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주고받습니다. '목로(木壚)'는 술잔을 놓기 위해 나무판으로 좁고 기다랗게 만든 테이블을 말하는데, 사람들은 거기 걸터앉아 막걸리를 들이켜고 있네요.
소박한 즐거움, 따뜻한 인간애, 웃음과 활기가 물씬 느껴지는 장면입니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이 구절에서 갑자기 조명이 어두워지면서 무거운 음악이 흐르는 것만 같네요. 오랜만에 시장에서 만나 '못난 놈들'끼리 반갑고 흥겨웠는데 그것도 잠시였네요.
등골 빠지게 농사 지어봐야 가뭄과 빚더미에 헤어날 수 없는 것이 농민들이 처한 답답한 현실입니다.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막걸리 취기(醉氣)로 불콰해진 우리 모두의 흔들리는 아버지가 보이는 것만 같은 대목이네요. 그때도 먹고살기 힘든 농촌을 벗어나 도시로 서울로 갔었네요.
거기 가면 다 잘 살게 될까요? 꿈이 이루어지게 될까요?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 아기를 뱄다더라'
- 신경림 시 '겨울밤' 중에서.
그러니 이 구절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는 깊은 탄식이네요. 먹고살기 힘든 비참한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몸부림이네요.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에라도 갈까'
그러나 그렇게 쉽게 현실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집에 가봐야 가난내가 펄펄 나는 가계(家計)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네요.
놀음('섰다')과 유흥('색시집')으로 울적하고 서글픈 마음이라도 달래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의 불콰한 아버지들은 그렇게 했을까요?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놀음과 유흥도 못했네요. 그런 것도 주머니에 뭐라도 있어야지 하지요. '색시집'은 고사하고 술집에도 못 가고, '학교 마당'에 모였다고 하네요.
거기 주저앉아 막걸리보다 도수가 센 소주를 마시네요. 얼른 취해버리고 싶은 마음일까요?
'찢다'. 이 구절 예사롭지 않네요. '오징어를' 찢는 심정이 느껴지는 것만 같네요. 농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호의호식하는 '잘난 놈들'에게 날리는 시인님의 돌팔매인 것만 같네요.
고단한 우리 아버지들을 비추는 달빛에게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빗방울이네도 시장에서 돌아오시던, 예전의 아버지가 떠오르네요. 아버지 손에 달랑 들린 검은 봉지가 떠오르네요.
우리 아버지들의 시장바구니는 이렇게 '고무신 한 켤레' '조기 한 마리'였네요. 아, '한 켤레', '한 마리'!
그것은 가장(家長)의 귀가를 기다리는 아내와 자식들을 위해 챙긴 선물입니다. 가져온 농산물을 이날 선 시장에 내다 팔아서 번 돈으로 산 선물이겠지요. 참으로 단출하여 서럽고, 참으로 소중하여 뜨거운 선물이네요.
그렇게 봉지 달랑 하나 들고 비틀거리며('절뚝이며') 걸어가는 우리 모두의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이네요.
시인님은 이 구절에서, 이때 '달'은 왜 환하다고 했는지!
절뚝이며 걸어가는 우리 모두의 아버지의 초라하고 쓸쓸한 모습 감출 수 없게, 아니 더 선명하게 보이도록 '달'은 왜 이리 환한 지!
달빛이여!
부디 우리 모두의 고단한 아버지들을 그 좋은 금빛으로 감싸고 쓰다듬어 주기를!
부디 이 세상의 '못난' 사람들, 삶이 힘겨운 낮고 어두운 곳을 그 좋은 금빛으로 환히 밝혀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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