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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윤동주 시 간(肝)

by 빗방울이네 2024.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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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님의 시 '간(肝)'을 만납니다. 양심과 신념 같은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에 대해 묵상하게 하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윤동주 시 '간(肝)' 읽기

 

간(肝)

 

- 윤동주(1917~1945, 북간도 명동촌)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 간(肝)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사스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肝)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 찌고

나는 여위여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멧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

 

- 「윤동주 시집 - 그의 시와 인생」(권일송 편저, 청목문화사, 1987년) 중에서

 

2.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

 

윤동주 시인님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1955년 10주기 증보판)에 보니, 시 '간(肝)'은 1941년 11월 29일에 쓰였다고 시 끝에 적혀 있네요.

 

이 때는 시인님이 연희전문을 졸업(1941. 12. 27)하기 한 달 전, 태평양전쟁이 터지기(1941. 12. 8) 10여 일 전입니다.

 

이즈음 일제의 억압과 횡포는 절정에 달했습니다. 우리말과 글을 사용하는 일이 금지됐고, 우리 역사를 배울 수 없었으며, 이름마저 일본이름으로 바꾸어야 했던 시절입니다.

 

이처럼 어둡고 답답한 절망의 시간을 건너고 있는 시인이라면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그때 윤동주 시인님은 우리 인체의 내장 중에서 가장 큰 장기이자 중심 장기인 '간(肝)'을 생각했네요.

 

왜 시인님은 간을 생각했을까요?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 습한 간(肝)을 펴서 말리우자,

- 윤동주 시 '간' 중에서

 

거북이의 꾐에 빠져 용궁에 따라갔다가 간을 잃을 뻔한 토끼 이야기, 귀토(龜兎) 설화 기억나시지요?

 

토끼가 용궁에 가게 된 것은 화려한 용궁에서 편안하게 살려고 했던 마음 때문입니다. '습한 간'. 생명의 본질이자 소중한 가치인 '간'이 그런 현실적 욕망에 젖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말리자고 하네요.

 

이 구절은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현실을 타개하지 못하고 현실적인 삶에 젖어버린 양심/신념('습한 간')을 정화하려는 의식으로 새겨집니다.

 

코카사스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肝)을 지키자,

- 윤동주 시 '간' 중에서

 

'코카사스 산중'.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준 프로메테우스가 날마다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형벌을 받는 곳입니다.

 

토끼의 간(약)과 프로메테우스의 간(형벌)이 중첩되면서 시의 볼륨이 커집니다. 간은 약이기도 하고, 형벌의 표적이기도 한, 생명의 소중한 장기입니다.

 

토끼가 도망쳐 나온 용궁이나 프로메테우스가 간을 쪼이는 형벌을 받는 코카사스 산중이나 모두 이 같은 '간'을 위협하는 공간이네요. 그런 험악한 곳에서 간은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 지켜야할 인간의 존엄성으로 새겨봅니다.

 

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 찌고 / 나는 여위여야지, 그러나,

- 윤동주 시 '간' 중에서

 

'독수리' '뜯어 먹어라'. 이 구절은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쪼아 먹는 독수리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 이야기를 타고 화자는 프로메테우스가 된 듯 독수리에게 명합니다.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 화자는 현실에 안주한 나머지 현실적 자아는 살찌고 이상적 자아는 여위었다는 것을 성찰합니다. 그래서 프로메테우스처럼 자신의 육체를 희생하겠다고 합니다. 이상적 자아를 위해서 말입니다. 독수리에게 육체를 희생당하더라고 이상적 자아('여윈 독수리')를 지키겠다고 다짐하네요.

 

"습한간을펴서말리우자"-윤동주시'간'중에서.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 - 윤동주 시 '간' 중에서.

 

 

 

3. '프로메테우수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거북이야! /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 윤동주 시 '간' 중에서

 

'거북이'는 '나'(토끼)를 꼬셔 용궁으로 데려간 이입니다. '나'를 유혹하는 존재, 나의 소중한 가치를 훼손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그런 부조리한 현실세계의 유혹에 타협하지 않고 소중한 가치, 양심과 신념을 지켜나가겠다는 화자의 각오가 느껴집니다.  

 

이 구절에서 화자의 마음의 변화, 앞으로 삶에 대한 각오가 느껴집니다. 일제의 횡포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 나의 소중한 가치와 인간의 존엄을 지키며 살아가겠다는 의지 말입니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멧돌을 달고 /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

- 윤동주 시 '간' 중에서

 

인간에게 최초로 불을 훔쳐다 준 프로메테우스입니다. 그 죄로 코카사스 산정에서 천년 동안이나 독수리에게 간을 파 먹히는 프로메테우스입니다. 

 

화자는 프로메테우스를 지향합니다. 낮에 파 먹힌 간이 밤에 자라나 다시 낮에 파 먹히는 끔찍한 형벌이 천년이 계속된다 하여도 프로메테우스를 연민하며 지향합니다. '목에 멧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어두운 현실, 어떤 고난이 온다 하더라도 소중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며 극복하겠다는 저항의식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일본 유학 중이던 시인님은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45년 2월 16일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꽃 같은 육신을 일제에게 뺏기고 말았던 것입니다.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동생 윤일주 님의 문장을 함께 읽습니다.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져가라"

이런 전보 한 장을 던져 주고 29년 간을 시와 고국만을 그리며 고독을 견디었던

사형(舍兄) 윤동주를 일제는 빼앗아가고 말았으니,

이는 1945년 일제가 망하기 바로 6개월 전 일이었습니다.

- 윤동주 유고시집 1955년 10주기 증포판 오리지널 디자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소와다리, 2022년) 중에서

 

우리의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그렇게 억울하게 육신은 빼앗겼지만 고귀한 정신은 이렇게 오롯이 남은 우리의 프레메테우스! 

 

2월 16일, 윤동주 시인님의 기일밤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시인님은 시 '간'을 통해, 우리의 소중한 가치에 대해,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한 우리의 자세에 대해 거듭 묻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윤동주 시인님의 시를 더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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