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쓰고 스미기

이형기 시 11월

빗방울이네 2024. 11. 4.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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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기 시인님의 시 '11월'을 만납니다. 쓸쓸한 삶의 무대를 걸어온 지친 그대에게 전하는 11월의 말이 있습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이형기 시 '11월' 읽기

 

11월

 

이형기(1933~2005년, 경남 사천)

 

그가 가고 있다

빈 들판 저쪽으로 꾸부정한 키

누군지 알 수 없는 그가 혼자 가고 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뒤돌아본다

순간 말문이 막히는 마른 침

얼굴이 없다!

 

백지 한 장

이목구비가 다 지워진

썰렁한 백지 한 장

 

왜 그러나 이 친구

어디 아픈가?

 

실은 아무도 없는 들판

찬바람에 서걱대는 마른 풀잎들이

아까부터 그렇게 나보고 묻고 있다

 

▷「이형기 시전집」(이형기 지음, 이재훈 엮음, 한국문연, 2018년) 중에서.

 

2. 11월의 빈 들판을 홀로 가고 계십니까?

 

시 '11월'은 이형기 시인님의 제6시집 「심야의 일기예보」(1990년)에 실린 시입니다.

 

이형기 시인님은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시작되는 시 '낙화'의 시인입니다.

 

시 '11월'은 시인님 50대 후반 즈음의 시네요.

 

가을이 깊어 겨울로 건너가는 시간, 한 해의 끝자락에 도달하는 11월이네요.

 

달력도 한 장 밖에 남지 않은 11월입니다.

 

올해는 어떻게 달려왔을까? 자꾸만 지난날을 돌아보게 되는 시간입니다. 

 

11월에 그렇게 자신을 돌아본 시인님의 눈에는 무엇이 보였을까요?

 

'그가 가고 있다 / 빈 들판 저쪽으로 꾸부정한 키 / 누군지 알 수 없는 그가 혼자 가고 있다'

 

11월이라는 시간의 들판에 '그'가 보입니다.

 

'그'가 가고 있는 곳은 아무도 없는 황량한 '빈 들판'입니다.

 

애면글면 살아내느라 '그'의 등은 꾸부정하게 굽었고요.

 

그런 '그'의 11월은 '혼자'입니다.

 

'그'는 화자 자신일 텐데요, '누군지' 알 수 없다고 하네요.

 

누군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이 낯선 이방인처럼 보이는 11월입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외로울 수밖에 없는 무대에서 쓸쓸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 봅니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이렇게 부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11월입니다.

 

그렇게 내가 나라도 부르지 않고는요.

 

11월엔 누구라도 '빈 들판'에 '혼자' 아니겠는지요?

 

누구라도 지쳐 '꾸부정한 키' 아니겠는지요?

 

"그가_가고_있다_빈_들판_저쪽으로_꾸부정한_키_누군지_알_수_없는_그가_혼자_가고_있다"-이형기_시_'11월'_중에서.
"그가 가고 있다 빈 들판 저쪽으로 꾸부정한 키 누군지 알 수 없는 그가 혼자 가고 있다" - 이형기 시 '11월' 중에서.

 

 

3. 어디 아픈가? 하고 위로하고 위로받고 싶은 11월

 

'뒤돌아본다 / 순간 말문이 막히는 마른 침 / 얼굴이 없다!

백지 한 장 / 이목구비가 다 지워진 / 썰렁한 백지 한 장'

 

참으로 기 막히는 일이네요.

 

그렇게 '빈 들판'에 '꾸부정한 키'로 '혼자'가는 '그'를 불러 세워 보니 '얼굴이 없다'라고 합니다.

 

귀와 눈과 입과 코가 다 지워졌다고 합니다.

 

'얼굴'은 표정이 있는 곳입니다.

 

'얼굴'이 없는 '그'는 표정이 없다는 말이겠네요.

 

자신만의 표정이 없는 '그'는 다른 사람들과 더 이상 구분되지 않게 되었네요.

 

자신의 길을 가고 싶었던 그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보니 지난 시간은 온통 '가면놀이'의 시간이었네요.

 

삶의 절박한 국면마다 '그'는 얼마나 자주 '얼굴'을 바꾸어야 했겠는지요?

 

그리하여 '그'는 자신만의 표정이 다 지워진, 얼굴 없는 얼굴이 되었습니다.

 

11월, 우리 또한 누구라도 '백지 한 장'으로 남은 얼굴의 존재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왜 그러나 이 친구 / 어디 아픈가?

실은 아무도 없는 들판 / 찬바람에 서걱대는 마른 풀잎들이 / 아까부터 그렇게 나보고 묻고 있다'

 

누구라도 '빈 들판' 같은 시간을 '혼자' 가는 11월입니다.

 

살기 위해 저마다 안간힘을 힘을 다하여 지난 시간을 달려왔습니다.

 

그때 누군가 이렇게 말을 걸어온다면 얼마나 위로가 되겠는지요?

 

어디 아픈가?

 

이렇게 한 사람이라도 나의 안위를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행복해질 수 있겠지요?

 

그런데 그렇게 나를 물어주는 이가 '찬바람에 서걱대는 마른 풀잎'이라고 하네요.

 

'찬바람에 서걱대는 마른 풀잎'이 되면, 그때는 타인의 아픔이 보이게 되는 걸까요?

 

쇠락과 소멸로 가는 11월의 '빈 들판'입니다.

 

'빈 들판 저쪽으로 꾸부정한 키'로 '혼자' 가고 있는 이가 있으면 다가가서 알은체를 해야겠습니다.

 

여보세요, 어디 아픈 데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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