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수 시인님의 시 '할머니 꽃씨를 받으시다'를 만나 봅니다.
지금 어떤 희망의 꽃씨를 받고 있는지 우리에게 묻는 것만 같은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박남수 시 '할머니 꽃씨를 받으시다' 읽기
할머니 꽃씨를 받으시다
- 박남수(1918~1994, 평양)
할머니 꽃씨를 받으신다.
방공호(防空壕) 위에
어쩌다 핀
채송화 꽃씨를 받으신다.
호(壕) 안에는
아예 들어오시덜 않고
말이 수째 적어지신
할머니는 그저 노여우시다
- 진작 죽었더라면
이런 꼴
저런 꼴
다 보지 않았으련만 ···
글쎄 할머니,
그걸 어쩌란 말씀이서요.
수째 말이 적어지신
할머니의 노여움을
풀 수는 없었다.
할머니 꽃씨를 받으신다.
인제 지구(地球)가 깨어져 없어진대도
할머니는 역시 살아 계시는 동안은
그 작은 꽃씨를 털으시리라.
▷ 한국현대시문학대계 21 「박남수 김종한」(지식산업사, 1982년) 중에서
2. 이 시의 상황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단어는?
'어둠은 새를 낳고, 돌을 / 낳고, 꽃을 낳는다'
이렇게 시작되는, 우리 모두 사랑하는 시 '아침 이미지 1'의 시인이 바로 오늘 만나는 박남수 시인님입니다.
1918년 평양 출생인 시인님은 한국전쟁(6·25 전쟁) 때 남한으로 내려왔습니다.
시인님이 내려온 때는 '1·4 후퇴' 때였습니다.
'1·4 후퇴'를 잠깐 톺아봅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한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을 무찌르며 압록강 두만강까지 진격했는데요, 전쟁에 합류한 중공군(중국군)에 밀려 38선 이남지역으로 철수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게 된 날이 1951년 1월 4일이라서 이때의 역사적 사건을 '1·4 후퇴'라고 부릅니다.
그 당시 철수하던 한국군과 유엔군을 따라서 남으로 내려온, 그래서 그 후 이산(離散)의 아픔 속에 살아야했던 북한 주민들이 10만 명을 헤아린다고 합니다.
시 '할머니 꽃씨를 받으시다'는 시인님이 그렇게 남하해서 처음 쓴 작품으로 전해집니다.
그러니까 시인님 30대 초반의 작품이네요.
같은 민족끼리 총칼로 싸워야했던 그 전쟁은 얼마나 치열했던지요!
그 속에서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펼쳐지지 못한 꿈들이 쓰러져 갔던지요!
'할머니 꽃씨를 받으신다 / 방공호(防空壕) 위에 / 어쩌다 핀 / 채송화 꽃씨를 받으신다'
이 시 속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어가 '방공호(防空壕)'입니다.
'방공호(防空壕)'는 적의 항공기 공습이나 대포, 미사일 따위의 공격을 피하기 위하여 땅속에 파 놓은 굴이나 구덩이를 말합니다.
할머니는 일상의 평화로운 꽃밭에서 '채송화 꽃씨'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의 아비규환 속에서 생명을 위협하는 무서운 폭격을 피하는 '방공호 위에 어쩌다 핀' '꽃씨'를 받는다고 하는군요.
그 장면을 떠올리고 있으니, 이스트를 넣은 반죽처럼 시가 서서히 부풀어 오르는 것만 같네요.
'호(壕) 안에는 / 아예 들어오시덜 않고'
이 구절에서 우리는 시의 화자가 지금 '방공호' 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밖에 언제 포탄이 떨어질 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입니다.
사람들이 '방공호' 속에 피해 조마조마하게 바깥의 동태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을 것만 같네요.
공포에 떨면서 저마다 가슴을 조이면서 말입니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호 안에는 아예 들어오시덜 않고' '방공호 위에 어쩌다 핀 채송화 꽃씨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말이 수째 적어지신 / 할머니는 그저 노여우시다
- 진작 죽었더라면 / 이런 꼴 / 저런 꼴 / 다 보지 않았으련만 ···'
'이런 꼴 / 저런 꼴'. 할머니는 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끔찍한 살상과 파괴를 눈앞에서 목격했을 것입니다.
할머니 가족과 이웃들이 그 속에서 참혹하게 희생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할머니의 소박하고 고요한 삶을 송두리째 휘저어버린 전쟁에 대하여 '할머니는 그저 노여우시다'라고 합니다.
'글쎄 할머니 / 그걸 어쩌란 말씀이서요 / 수째 말이 적어지신 / 할머니의 노여움을 / 풀 수는 없었다'
이 이해할 수 없는 전쟁의 시간이 어이없고 화 나기는 시의 화자도 마찬가지였겠지요.
그래도 이렇게 할머니를 만류하고 달랬던가 봅니다.
할머니, 그렇게 할머니가 성을 낸다고 전쟁이 멈추어진답디까!
할머니, 지금 밖은 위험해요, 빨리 방공호 속으로 들어오시라니까요!
사람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이 전쟁 통에 그 얄궂은 '꽃씨'는 받아 뭣에 쓰려고 그 야단은 야단이냐고요!
어서 방공호 속으로 들어오세요!
시의 원문에는 '할머니의 노여움을'이라고 한 뒤 한 줄 바꿔 오른쪽으로 자리를 많이 옮겨 '풀 수는 없었다'라는 시행을 배치하였네요.
그렇게 벌어진 빈 공간에서 화자의 긴 한숨이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전쟁에 대한 분노, 그리고 이렇게 삶의 위기에 내몰린 처지에 대한 두려움과 서러움이 섞인 탄식 말입니다.
3. 전쟁의 비극 속에 핀 꽃씨를 받는 마음에 대하여
화자는 방공호 속으로 들어오지 않고 '꽃씨'를 털고 있던 할머니를 그렇게 으르고 달랬겠습니다.
그런데요, 그런 할머니를 가만히 보고 있던 화자의 마음에 문득 맑고 차가운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나 봅니다.
'할머니 꽃씨를 받으신다 / 인제 지구(地球)가 깨어져 없어진대도'
이 구절이 갑자기 우리를 저 푸른 영원의 공중으로 부양시켜 주네요.
이 5연에 나온 '할머니 꽃씨를 받으신다'는 1연의 첫 행과 똑같은 구절입니다.
그러나 그 분위기는 서로 완전히 다르게 다가오네요.
화자는 할머니가 '꽃씨'를 받는 마음을 부지불식 간에 알게 되었네요.
생명과 희망, 사랑이 송두리째 빼앗기고 자연이 처절하게 파괴되는 참혹한 전쟁 중입니다.
그 아비규환 속에서도 내일 사용할 씨앗을 받는 마음, 그 높고 빛나는 마음 말입니다.
그 높고 빛나는 마음은 전쟁의 폭력과 야만이라는 깜깜한 어둠 속에 반짝이는 별빛 같은 마음이겠습니다.
할머니가 채송화라는 작은 꽃의 씨를 받고 있는 장면은 한 장의 스냅사진 같습니다.
사소하지만 따뜻한 풍경이네요.
그래서 오히려 이 나라에 벌어진 전쟁의 비참과 비극을 더 선명하게 부각해 주는 것만 같습니다.
'할머니는 역시 살아 계시는 동안은 / 그 작은 꽃씨를 털으시리라'
마지막 5연을 음미하니 우리에게 익숙한 하나의 문장이 떠오르네요.
-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으리라.
참을 수 없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꽃씨를 털고 있는 할머니입니다.
두려워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그저 오늘을 묵묵히 사는 할머니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면서 무엇보다 지금 이 순간을 빽빽하게 사는 할머니입니다.
이 시의 제목을 다시 들여다봅니다.
'할머니 꽃씨를 받으시다'
시제(時制)가 없는 문장이네요.
그래서 더욱 엄숙한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삶을 살아내고 생명을 살리고 이어가는 법칙을 담은 소중한 선언의 문장이네요.
지금 그대와 빗방울이네는 어떤 작은 희망의 '꽃씨'를 받고 있는 중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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