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시인님의 시 '탕약(湯藥)'을 만납니다.
허허로운 이 겨울의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귀한 보약 같은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백석 시 '탕약(湯藥)' 읽기
탕약(湯藥)
백석(1912~1995년, 평북 정주)
눈이 오는데
토방에서는 질화로 우에 곱돌탕관에 약이 끓는다
삼에 숙변에 목단에 백복령에 산약에 택사의 몸을 보한다는 육미탕(六味湯)이다
약탕관에서는 김이 오르며 달큼한 구수한 향기로운 내음새가 나고
약이 끓는 소리는 삐삐 즐거웁기도 하다
그리고 다 달인 약을 하이얀 약사발에 밭어놓은 것은
아득하니 깜하야 만년(萬年) 녯적이 들은 듯한데
나는 두 손으로 고이 약그릇을 들고 이 약을 내인 녯사람들을 생각하노라면
내 마음은 끝없이 고요하고 또 맑어진다
▷「정본 백석 시집」(백석 지음, 고형진 엮음, 문학동네, 2019년 32쇄) 중에서.
2. 백석 시인이 달여준 보약 같은 시 '탕약'
백석 시인님의 시 '탕약(湯藥)은 1936년 3월 「시와 소설」에 발표된 시입니다.
'탕약(湯藥)'은 달여서 마시는 한약을 말합니다.
요즈음은 탕약을 한의원에서 달여서 비닐봉지에 넣어서 주지만 예전에는 집에서 직접 달여서 먹었습니다.
어떻게 달여 먹었을까요?
이 시에서는 몸이 아파서 먹는 한약이 아니라 몸을 보하기 위해 먹는 한약입니다.
시인님이 달여주시는 보약같은 시 '탕약' 한 그릇 하십시다.
'눈이 오는데'
눈이 오는 겨울입니다. 보약은 이처럼 겨울에 먹었습니다.
예전에 사람들은 몸을 왕성하게 움직이는 계절에는 보약을 잘 먹지 않았습니다.
땀으로 비싼 보약 다 배출된다고 해서요.
그래서 몸을 많이 움직이지 않는 겨울철에 보약을 달여 먹었습니다.
지금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보약을 먹지만요.
'토방에서는 질화로 우에 곱돌탕관에 약이 끓는다'
'토방'은 방에 들어가는 문 앞에 좀 높이 편평하게 다진 흙바닥을 말합니다.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딛는 토방돌이 놓여 있기도 하고, 쪽마루를 놓기도 하는 곳입니다.
그러니 '토방'은 실내가 아니라 밖입니다. 그 토방에서 한약을 달이고 있네요.
'질화로'는 흙으로 빚어서 만든 화로입니다. 그 질화로의 시뻘건 불 '위에('우에')' '곱돌탕관'이 놓여 있네요.
'곱돌탕관'은 곱돌로 만들어진 약탕관입니다. 곱돌은 기름 같은 광택이 있고 매끈매끈한 돌을 말합니다.
약탕관은 탕약을 달이는 데 쓰는 길죽한 손잡이가 달린 질그릇입니다.
하얗게 눈이 오는 날, 토방의 곱돌탕관에서 탕약이 보글보글 끓고 있다고 하네요.
어떤 탕약일까요?
'삼에 숙변에 목단에 백복령에 산약에 택사의 몸을 보한다는 육미탕(六味湯)이다'
끓고 있는 탕약은 '몸을 보한다는 육미탕(六味湯)'이라고 합니다.
환자가 있어서 치료를 위해 달이는 탕약이 아니라 이 집의 허약해진 누군가의 몸을 건강하게 하는 보약이네요.
그래서 우리는 마음이 조금 놓이네요. 우리 몸에도 조금씩 보약의 기운이 들어오는 기분이네요.
'몸을 보한다는'이라는 구절에 눈길이 머물게 됩니다.
'보한다'는 말에서 '보'는 한자어 '補'입니다.
'補'는 '떨어지거나 헤진 곳을 꿰매다'라는 기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기본 뜻에서 '돕다, 보좌하다, 고치다, 개선하다, 보태다, 보충하다, 채우다' 같은 다양한 뜻이 파생되어 쓰이게 되었네요.
그러니 '육미탕'은 우리 몸의 해진 곳을 꿰매주는 효능이 있겠네요.
'육미탕(六味湯)'은 숙지황, 산약, 산수유, 백복령, 목단피, 택사 등 6가지 약재가 들어가는 보약입니다.
피로를 풀어주고 이뇨작용과 갈증에 이용되는 한약이라고 합니다.
이 시에서는 산수유 대신 '삼(인삼)'이 들어간 육미탕이네요.
그래서인지 더 효능이 좋을 것만 같고요.
'약탕관에서는 김이 오르며 달큼한 구수한 향기로운 내음새가 나고
약이 끓는 소리는 삐삐 즐거웁기도 하다'
이 구절에 이르러 일제히 우리의 오감이 작동하는 것을 느낍니다.
하얀 '김이 오르며'(시각) '달큼한 구수한 향기로운 내음새가 나고'(후각) '약이 끓는 소리'(청각)가 들립니다.
눈이 오는 날은 고요합니다.
그런 시간, 토방에서 한약이 끓고 있네요. 고요한 집안에는 몸에 좋은 느낌을 주는 한약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네요.
'약이 끓는 소리는 삐삐 즐거웁기도 하다'
이 시에서 가장 돋보이는 구절의 하나입니다.
한약이 끓으면서 약탕관 뚜껑의 작은 구멍으로 압축된 뜨거운 증기가 빠져나오면서 삐삐 소리를 내고 있다고 하네요.
보약이니 이 소리가 즐거운 느낌이겠다는 생각이 들고요,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백석 시인님이니 이 소리가 즐거운 느낌이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서 우리도 시인님 마음이 되어 어쩐지 자꾸 즐거워지는, 그런 마법을 부리는 시행입니다.
3. '만년(萬年) 녯적'이 든 탕약을 응시하며 마음 맑아지다
앞의 1연은 탕약을 끓이는 모습을, 뒤의 2연은 다 끓인 탕약을 짜서 약사발에 액체만 여과시켜 놓은 것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다 달인 약을 하이얀 약사발에 밭어놓은 것은'
'밭다'는 '건더기와 액체가 섞여 있는 것을 체 같은 데에 따라 부어서 액체만 따로 받아 내다'라는 뜻입니다. '거르다' 또는 '여과하다'라는 뜻이네요.
이 구절에서 빗방울이네도 추억이 소록소록 돋네요.
예전에 어머님이 다 달인 탕약을 1차로 삼베에 거른 뒤 탕약 건더기를 삼베로 감싸 막대기를 걸어 돌려서 짜던 모습이 생생히 떠오르는 그리운 장면입니다.
소중한 탕약이니 한 방울이라도 더 짜내려 힘을 주느라 벌겋게 달아오른 어머님 얼굴도 떠오르네요.
그러면 삼베에는 국물이 거의 없는 약재 건더기만 남았는데, 어머님 몰래 그 속에서 말랑해진 감초를 찾아서 씹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지요.
그걸 들켜서 어머님한테 혼도 나곤 했답니다. 한번 더 달여 먹어야 하는 귀한 한약이었으니까요.
'아득하니 깜하야 만년(萬年) 녯적이 들은 듯한데
나는 두 손으로 고이 약그릇을 들고 이 약을 내인 녯사람들을 생각하노라면
내 마음은 끝없이 고요하고 또 맑어진다'
지금 시인님은 하얀 약사발에 받아놓은 까만 탕약을 들여다 보고 있습니다.
우리도 시인님처럼 이 '아득하니' 까만 한약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산과 들의 그 많은 식물에서 어떻게 딱 맞는 약효를 찾아냈을까?하는 생각에서요.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동의보감을 펴낸 허준은 1,400종의 약물, 4,000여 가지의 처방을 분류하고 있습니다. 이 처방은 2천여 가지의 증상과 연결되어 있고요.
이 시에 등장하는 육미탕 하나만 하더라도 이 여섯가지 약재가 알맞게 어우러져 우리의 몸을 돕는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요?
그래서 시인님은 그 까만 탕약에 '만년의 녯적이 들은 듯한데'라고 합니다.
'만년의 녯적'은 헤일 수 없이 오랜 세월 동안 쌓인 옛사람들의 지혜를 떠올리게 하네요.
거듭된 실패와 좌절, 그리고 성공들 말입니다. 이런 수많은 지혜와 저런 수많은 지혜의 총합 말입니다.
그 '만년의 녯적'이 버무려지고 끓고 달여진 것이 바로 이 탕약이라는 존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생각만으로 '내 마음은 끝없이 고요하고 또 맑어진다'라고 시인님은 말하네요.
우리도 시인님을 따라 '하이얀 약사발'에 짜놓은 까만 탕약을 응시하며, 그 탕약에 깃든 만년의 시간 속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네요.
그 아득하니 까만 시간의 깊고 깊은 내력이 우리의 마음을 고요하고 맑게 씻어 주네요.
읽고나니, 정성껏 달인 탕약 한 대접 복용한 듯, 몸이 더워지는 시입니다.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백석 시인님의 시를 더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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